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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동료된거야, 선분양] ② K-선분양의 역사

by Hanya Kennen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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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동료된거야, 선분양
  ① K-선분양과 해외 사례 이동
  ② K-선분양의 역사
  ③ K-수분양자 보호 제도 이동
 

목차

1. 개요

2. 해외와 우리나라의 선분양 방식

  2.1 해외의 선분양

  2.2 K-선분양

3. K-선분양의 역사

  3.1 공공(公共)이 쏘아올린 작은 공

  3.2 시장이 굴린 스노우볼

  3.3 이렇게 된 이상 제도화로 간다!

4. 수분양자 보호 제도

  4.1 주택분양보증

  4.2 하자보수관련

  4.3 주택 외의 분양상품  


3. K-선분양의 역사

3.1. 공공(公共)이 쏘아올린 작은 공

선분양 제도는 1960년대 초기부터 있어왔다. 물론 분양가격의 절반 이상을 미리 납부하는 K-선분양의 형태가 아니라, 해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전예약 형태였다.

 

60년대 초까지 아파트라는 주택 양식은 정책적인 장려 단계에 있었고, 대부분 공공부문[각주:1]에서 공급했다. 분양은 보통 준공 1개월 전에 분양공고를 내고 '입주금 선납' 방식으로 입주자를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1969년 이촌동 한강맨션 건설 사업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대한주택공사(주공)[각주:2]는 입주금 선납 시기를
착공시점으로 당겨버리는 묘수를 둔다.

수분양자를 모집하는 분양공고를 착공과 동시에 내면서 분양가격의 10%를 계약금으로, 40%를 중도금으로 준공까지 3회에 걸쳐 납부하게 했다. 수분양자에게 주택 건설 비용을 분담시키는 K-선분양 구조는 이렇게 탄생했다.

K-선분양의 발상지, 이촌동 한강맨션

 

선례가 만들어지자 다른 개발 사업에서도 선납금 납부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스리슬쩍 액수도 커져서 중도금 납부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각주:3] 

 

개발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공공 부문이 이렇게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사냥한 이유는 물론 집을 지을 돈이 없어서다. 한정된 자금으로 산업 인프라 확충에 매진해야 했던 당시 정부에게 주택 공급은 투자 우선순위가 아니었다.[각주:4]

 

산업화가 성과를 내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이 있었고, 그에 발맞춰 도시 인구집중 급속하게 진행된다. 1960년 244만명이었던 서울시의 인구는 1966년 380만명으로 미친 상승을 보여준다.

 

집을 그만큼 뚝딱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히 심각한 주택난이 펼쳐진다. 1966년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50%로 최저점을 찍었다. 그 50%마저도 판자집과 비닐하우스 등 가시설과 하숙, 고시원 등 집단거주시설까지 영끌한 수치였다.[각주:5] 

 

도시에서는 셋방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이런 방조차도 모자란데 지붕은 필요하니, 무허가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서며 판자촌을 이뤘다. 산꼭대기까지 집이 들어차 달동네가 되었다. 

청계천 판자촌 전경
마 부산도 스울이랑 똑같다 (산복도로 주택가 전경)

 

넘치는 실수요에 투자 수요까지 더해져 주택가격은 "님 지금 공급 안함?? 응 오를게"를 외치며 마이웨이를 갔다. 주택 공급을 위해 도시 외곽에 건설 용지를 조성하려고 했더니 토지가격도 "아 개발하려고? ㅇㅋ 폭등할게"를 외치며 마이웨이를 갔다.[각주:6]

 

이런 가운데 1970년 와우동 시민아파트 붕괴 사고, 1971년 철거민 강제 이주 과정에서 촉발된 광주대단지사건 연이어 터지면서, 주택 문제는 더이상 미봉책으로 일관할 수 없는 사회 불안 요인이 되어버린다. 

 

결국 1972년, 사회적 불만을 달래줄 필요성 마침 또 강했던 정부는 주택 250만 호 건설을 목표로 하는 '주택 건설 10개년 계획'를 발표하고, 「주택건설촉진법」제정[각주:7], '아파트지구'[각주:8] 신설 등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다.

 

하지만 동시에 정부는 중공업 육성 등 경제개발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태였다. 따라서 공적 자금을 직접 투입하기보다는 그간 경제개발의 파트너가 돼주었던 민간 건설사 중심의 주택 공급 확대를 목표로 한다. 

시장 논리에 따라 주택의 상품성을 강화하여
구매력이 있는 중산층에게 분양하는 것으로
주택 공급 정책의 기조가 잡힌 것이다.

 

3.2. 시장이 굴린 스노우볼

가라 건설몬! 백만 주택!

민간 부문은 공공 부문이 개척한 K-선분양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시행&시공을 겸하며 사업 부담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건설사 입장에서는 건설 자금을 무이자로 조달 가능한 K-선분양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각주:9]

 

주택 공급을 민간에 일임한 정부 입장에서도 선분양을 통하면 주택 실수요를 조기에 진정시켜서 정책효과를 즉시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수분양자 입장에서는 어떠했을까? 물론 공급자가 갑(甲)인 주택 부족 상황에서 수요자는 K-선분양이든 뭐든 까라면 까야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점은 있었다. 

 

주택난과 더불어 고속성장으로 물가상승률이 두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주택 가격 상승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실수요자 입장에는 신축 주택을 구매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당장 선분양을 받는 것 뿐이다. 선분양을 받아서 주택 구매 가격을 확정하고 이를 공사 기간에 걸쳐 나눠내므로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바꿔말하면 선분양을 받으면 무조건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즉 선납금을 내기 위해 빌린 돈의 이자보다 입주 후 주택의 가격상승분이 더 높은 경우 수분양자는 그 차액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다.

 

굳이 입주 시점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그냥 분양권 상태에서 웃돈[각주:10]을 얹고 판매 수도 있었다. 이렇듯 주택 가격 상승 기조에서 K-선분양은 수분양자에게도 남는 거래였다.

 

 

문제는 이게 좀 심했다는 것이다.

 

1970년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중동 특수'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석유를 무기화하여 돈잔치를 벌이는 산유국들의 두둑해진 배때지에 건설사라는 좋은 빨대를 꽂고 오일머니를 흡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11] 

 

1975~1980년 간 중동에서 건설 부문이 벌어들인 달러는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를 차지할 정도였다. 수많은 가장들이 '몇년만 고생하면 내 집 장만이 뚝딱'이라는 말을 듣고 중동으로 달려갔다. 이들이 사막의 열토 위에서 고생해서 번 돈은 곧장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1974년 중동으로 파견된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투자수요 또한 부동산 시장으로 몰렸다. 아직 금융시장이 미약한 시기라 부동산말고는 확실한 투자처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 세력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무더기로 청약을 넣어 분양 경쟁률을 높였고[각주:12], 분양권 추첨에 당첨되면 이를 되팔아서 프리미엄을 먹었다.[각주:13] 암표상들이 티켓을 싹쓸이 해서 비싸게 파는 것과 똑같은 수법이라 할 수 있다.

 

실수요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를 올리거나, 기도를 외면한 하늘을 원망하며 비싼 가격에 분양권을 사는 방법 뿐이었다. 분양권 가격이 오르니 자연히 신축 아파트 시세도 이에 맞춰 형성됐고, 신규 분양가격도 상승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부동산 투기 세력의 대명사인 '복부인'

3.3. 이렇게 된 이상 제도화로 간다! 

...부녀자도 은행 돈을 빌려 땅을 사면 1년에 30% 이상, 운만 좋으면 몇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중략)... 전 국민이 투기에 나섬으로써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의 의욕을 꺾고 주택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인플레 유발의 가장 큰 원인도 되었다. 
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中

 

정부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976년 「주택건설촉진법 시행규칙」개정을 통해 국민주택[각주:14]에 한하여 1세대 1주택 및 무주택자 요건을 공급 조건에 추가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역시 국민주택에 한해 선분양 방식에 규제(공사진행률 20% 시점 부터 분양 가능, 계약금은 분양가격의 20% 이내, 중도금은 60% 이내 등[각주:15])를 슬쩍 넣어 선분양 제도가 정식 법제화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무주택자들의 명의를 동원해 중복 청약을 넣는 등 투자수요가 진정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1977년 7월 '분양가 상한제'를 전면 도입[각주:16]한다.

 

그리고 다음 달인 8월 「국민주택 우선 공급에 관한 규칙」, 이듬해 5월 「주택 공급에 관한 규칙」 제정을 통해, 실수요자에게 신축 주택을 배분하기 위한 가챠 시스템인 주택청약제도[각주:17]를 도입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국민주택에만 적용되던 선분양 방식에 대한 규제를 전면 확대하였다. 

 

하지만 분양가 상한제와 맞물린 건설업계의 수익성 악화에 대한 정부의 스윗한 우려 덕분에, 선납금 비중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수분양자가 입주 전에
분양가의 최대 80%를 부담하는
K-선분양 방식이 고착화된다.

 

또한 정부는 무주택 세대주에게만 청약통장 가입자격을 주고 분양권 전매를 금지시킨 공공 부문과는 달리, 민간 부문에는 이러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았다.[각주:18] 그리하여 신축 주택 시장은 분양권을 사서 미래 시세차익을 노리는 시장과 아예 주택청약통장을 사서 당첨을 노리는 확률형 아이템 시장으로 양분된다.

 

이후 주택경기에 따라 분양가 상한제 및 주택청약제도는 규제와 완화를 거듭하며 혀를 내두를만큼 매우 복잡(...) 정교해지게 되는데... 이 내용까지 다루면 이 글이 터져버릴 것 같아 추후 다른 글로 다루겠다.

 

(다음 글에 계속..)

너 내 동료된거야, 선분양
  ① K-선분양과 해외 사례 이동
  ② K-선분양의 역사
  ③ K-수분양자 보호 제도 이동

 

  1. 대한주택공사, 서울시 [본문으로]
  2.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합체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되었다. [본문으로]
  3. 일례로 1971년 주공에서 공급한 남서울아파트(반포주공아파트)는 준공 15개월 전에 분양공고를 내고 6차에 걸쳐 중도금을 받았으며, 이렇게 쌓인 선납금은 분양가격의 85%를 차지할 정도였다. [본문으로]
  4. '주택건설 5개년 계획'이 시작했던 1962년에 주택 자금으로 배정된 재정 투,융자 금액은 65억 3천 9백만 환으로 전해에 비해 오히려 3억 4천 8백만 환이 줄어든 규모였다.(정다혜,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택정책과 주택사업의 시장화', 23p) [본문으로]
  5. 김재원, '1960년대 후반 서울시 주택정책과 중산층 문제 인식', 11p [본문으로]
  6. 1966년 평당 200~400원 수준이던 現 강남 지역의 땅 값은 1968년말 평당 5,000~6,000원으로, 1971년에는 14,000~16,000원으로 폭등했다. [본문으로]
  7. 2003년 「주택법」으로 전면 개정 [본문으로]
  8. 아파트지구로 지정된 지역은 아파트와 부속건물 외에 아무 것도 지을 수 없었다. 2003년 「국토법 시행령」개정으로 용도지구 분류 체계에서 삭제되었다. [본문으로]
  9. 게다가 당시 정부는 1973년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을 발표하고 은행 대출 자금을 죄다 제조업에 유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설사가 딱히 손을 벌릴 데도 마땅치 않았다. [본문으로]
  10. 통칭 프리미엄(premium) 더 줄여서 "피"라고 불린다. [본문으로]
  11. 거대 건설 프로젝트를 벌이던 중동국가들은 한국 건설사들의 미친 돌관공사에 깊은 감명을 받아 러브콜을 보내왔다. [본문으로]
  12. 1977년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에서는 한 사람이 2억원을 동원해 100가구를 신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조선일보, '新築 아파트에 投機戰爭',1977.03.16) [본문으로]
  13. 일례로 1977년 착공한 강서구 화곡주공시범아파트의 분양 경쟁률은 최고 178:1이었고, 잠실아파트 분양권은 프리미엄만 370만원~700만원에 달했다.(당시 말단 공무원 초임 기본급 월 5만원 대) [본문으로]
  14. 공공부문의 자금으로 건설되는 주택. 아파트의 경우 주거전용면적이 85㎡이하가 되어야 했는데, 이는 '국민주택규모'의 기준이 된다. [본문으로]
  15. 다만 국가, 지자체, 주공이 건설주체일 때는 미적용(...) [본문으로]
  16. 신축하는 주택에 일률적으로 전용평당 55만원이라는 상한가격을 정하고 이를 넘으면 사업자체를 승인해주지 않는 상남자식 규제였다. [본문으로]
  17. 세대주가 청약통장에 가입하여 일정 금액을 일정 횟수 납입하면 분양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제도. 무주택 등 일정 요건에 해당하면 가점을 통해 분양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다. [본문으로]
  18. 물론 공공 부문에서 분양하는 주택도 규제를 요리조리 회피해서 분양권 거래가 이뤄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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